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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마다 대성통곡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직딩H 2015. 2. 19. 07:00

 

 

 

  새해가 밝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 그리고 담배를 끊는다는 등의 새로운 다짐으로 늘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 그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을 겪으면서도 새삼 설날이 되면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또한 유독 새해 아침이면 너무도 침울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부모님께서는 형제가 별로 없다.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인 작은아버지는 외국에 계셔서 명절에는 순수하게 우리 네 식구(부모님, 누나, )끼리만 명절을 보냈다. 어머니께서도 남매 이신데, 외삼촌이 외국에 계셔서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명절이면, 항상 너무 고요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1987년도 북한산>

 

  그런데 꼭 한가지 치러야 할 과제가 있었다. 가족끼리 명절에 함께 무언가를 하자는 아버지의 반 강제적인 취지에서 시작 된 가족 등산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설날을 비롯해 명절 연례 행사로 치러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은산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호연지기를 만끽해라라는 것. 차례만 딱 끝나면 바로 온 가족이 산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산에 다녔던 것 같다. 누나랑 나는 너무 가기가 싫어서 아침마다 대성통곡을 하며 끌려가곤 했다.

 

  하지만 누나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누나의 등산 참석 여부는 자율이 되었고, 어머니도 힘들다시며 빠지시고... 아버지께서는 나만 무조건 끌고 다니셨다. 중생생이었던 나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때도 역시 산에 가기가 싫어서 서러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께서는 당근(용돈, 장난감, 옷 등)을 주시며 나를 유혹하곤 하셨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도 연례 행사는 계속 되었다. 3때도하루 공부 안 해도 대학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시며 저를 끌고 다니셨다. 고등학교 때는 좀 머리가 컸다고 인상을 박박 쓰면서 따라 나서곤 했다. 일종의 반항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다지 통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저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아무 지장없이 대학에 들어갔고,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이듬해 설 연휴에 운 좋게 특박을 나올 수 있었다. 집에 미리 얘기를 안하고짜잔하고 나타났는데, 차례를 끝내고 아버지랑 누나랑 산에 갈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이번에는 나도 기분 좋게 따라 나섰다.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 아버지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 늙어서 몇 년 후에는 산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아빠 건강할 때 잘 따라다녀라

 

정말 사진을 보니, 아들보다 크시던 아버지께서 아들보다 많이 작아져 있다.

 

  흘려 들었던 그 말은 결국 몇 년 뒤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나이가 드셔서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함께 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 설날 아침이면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산에 가기 싫어 울었는데, 이제는 설날 아침만 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나곤 한다. 기분 좋게 아버지를 따라 나서지 못한 것이 많이 죄송스럽기만 하다.

 

 <2011년 타포차우산, 2002년도 사패산>

 

   그래도 아버지의 특훈 덕분에 나는 산을 아주 잘 타게 되었다. 이제 내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내가 아버지의 타이틀을 물려 받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자식들이 얼른 자라나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 아빠가 그랬듯이 명절 아침마다 산에 데리고 갈 계획이다.  

 

"모두 모두 행복하시고, 감격스러운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