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선 종로3가 역에서 3호선을 갈아타러 가는 길, 에스컬레이터 옆에 아주 작은 서점이 있다. 마침 읽던 책을 다 읽었던 터라 무작정 서점에 들어갔다. 왠지 익숙한 책(표지)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손이 먼저 반응했다. 사실 책 내용은 전혀 몰랐고, 작가의 이름만 조금 익숙했다. 어떤 경로로 연이 닿았는지 몰라도 브런치에서 이기주 작가의 글을 종종 접했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이웃(물론 일방적인 이웃)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무의식적인 끌림이 작용했던 것 같다.
여기저기 남겨진 작가의 글을 보면 조용하고, 잔잔하고, 침착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냉정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기자 출신이라 '냉정'이라는 느낌이 추가됐는지도 모르겠다. 글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냥 작가의 책을 읽고 들었던 생각일 뿐.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슬픈 글을 주로 쓰는 작가가 내건 글이 인상적이었다.
"슬픈 글을 쓴다고 제 인생 자체가 슬픈고 우울한 건 아닙니다. 섣부른 위로, 힘내라는 말은 더 이상 보내지 마세요"
이처럼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겠지?
책을 읽고 얼마 뒤 앞자리에 앉은 동료가 "요즘 뭐 읽을 만한 책 없어?"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퀴즈 정답이라도 맞히듯 "언어의 온도"라고 말했다. 그만큼 나에게 긴 여운을 남긴 그런 책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표지부터 내용까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네'라는 생각을 했다.(여자들한테는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삭막했던 출퇴근 길, 내 곁에서 소중한 벗이 되어주었으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에스키모와 분노였다.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분노를 대하는 방법 中>
분노에 찬 후배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주문을 하고 앞에 있는 후배에게 나도 모르게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이라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나는 이런 자상한 선배가 아닌데,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런데 술자리에서도 분노한 동료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화가 난 아내에게도 그랬다. 이제는 입에 배어 나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이렇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슬펐다. 분노하지 않으면 분노를 다스릴 일도 없을 텐데…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행의 목적 中>
사실 '여행의 목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도 모른다"일 것이다. 물론 공감이 가는 말이지만, 나는 서두에 쓰인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누군가가 떠올랐고, 함께했던 과거의 잊혔던 기억, 진실이었던 사실이, 순간적으로 튀어 올라 그대로 머리에 박혀 버렸다. 갑자기 내가 진실된 사람처럼 느껴졌고 종종 과거의 순간순간이 떠올라 미소를 짓기도 한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냥 한번 걸어봤다 中>
별 말도 아닌데, 마음을 움직인다. 너무도 익숙하게 내뱉던 말이 작가의 손을 거치니 보석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그냥"이라는 말을 정말 그냥 내뱉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냥"의 숨은 뜻을 상대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더 많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왜 내 마음을 모르니', '널 좋아해', '사랑해', '너랑 더 있고 싶어' 등의 무수한 말들이 "그냥"이라는 2음절에 담겨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책을 다 읽으면서 브런치에서 종종 읽었던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좀 더 미주알고주알 옮겨 적으며 내 마음도 덩달아 풀어내고 싶지만, 왠지 아껴두고 싶은 책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이 책에는 소녀의 마음, 소년의 마음, 부모의 마음, 아이의 마음, 직장인의 마음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모두를 두루두루 어루만지는 셀 수 없는 따듯함이 숨어있다. 페이지마다 듬성듬성 채워진 짧은 글 속에 따듯한 마음을 가득 채우며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채우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오랜만에 소녀 감성을 만땅 충전시켜준 그런 책. '언어의 온도'다. 사춘기 소년이 된 거 같은 기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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