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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내 인생 최악의 선생님

직딩H 2015. 5. 15. 15:21

 

  근 20여 년 전 고등학교 시절 담임의 이야기다.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서기를 했고,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도 곧잘 했다. 집에서는 누나가 워낙 공부를 잘해 그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봤지만,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선생님들께 예쁨을 받으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고교 평준화가 되어있지 않은 지역의 학교를 다녀 고등학교를 시험보고 들어갔다.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입학성적 전교 50등까지의 우수반을 운영했다. 나는 24등으로 입학을 했고, 우수반에 들게 되었다. 우수반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미래의 꿈을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설렘이 가득했던 고교 등교 첫 날. 담임 선생님이 등장했다. 험상궂은 얼굴에 말투까지 무서운 국어선생님이었다. 자기는 백골단 전경 출신이라며, 첫 날부터 폭력성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폭력성은 더욱 발전해 갔다. 칠판에서부터 주먹으로 학생을 패면서 사물함까지 갔다. 대걸레 자루 몇 개가 부러지도록 애들을 팼다. 툭하면 부모 운운하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 때부터 나의 화려했던 중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군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무조건 대답은 '다, , 까'로 끝나야 했다. 등교 시간은 6 30, 하교 시간은 오후 10, 집이 먼 사람 외에는 절대 예외가 없었다. 영어 교과서를 Lesson 1부터 통째로 암기를 시키는 건 기본,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건 더 기본, 화가 나면 주먹으로 패는 건 일상이 되어갔다. 이런 강압적인 방식에 적응하기가 참 힘들었다. Lesson 1 통째 암기 시험은 2명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구타로 끝이 났다. 정말 무서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닌 학교는 남녀 공학이라 자연스럽게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운도 없이 시내에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담임을 여러 번 마주 쳤다. 그 때부터 내 학교 생활은 군생활 꼬이듯 꼬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첫 모의고사를 봤다. 반에서 37(그래도 반의 특성상 전교에서도 40등 정도 됐다) “여자들이랑 그렇게 다니는데, 공부 할 시간이 있겠어? 부모님 고생하시는데, 잘 하는 짓이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비꼬면서 부모님을 운운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 언급에도 자존심 상하고 서러웠지만, 더욱 서러웠던 건 우리 반 꼴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성적은 늘 꼴등이었다. 모두 그 친구가 열심히 하는 걸 알기에 항상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 뒤 더욱 서러운 일이 발생했다. 선생님 말에 자극을 받아 공부를 했다. 다음 번 시험에서 전교 11등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반에서 꼴등이었다. 성적이 나온 날 선생님은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리고자기 성적에 만족하는 사람 손 들어라라고 말했다.

 

  '솔직히 누가 그런 상황에서 손을 들까?'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직딩한이, 너 손 안드냐?” 라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 꼴등인 친구보고도 손을 들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어린 마음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의 요지는...

 “직딩한이 같은 애들은

결국에는 잘 될 수 없다

 

하지만,

XXX(꼴등) 같은 애들은

'대기만성형'으로 결국 성공 할 것이다

 

  성적이 잘 나왔으면 박수라도 쳐줘야 할 판에 17살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니가 과연 2학년 때도 우수반에 들 수 있을까?" 라는 억지스러운 말...  수치스럽고, 눈물이 났다. 그날의 서러웠던 순간을 일기장에 적어놨다. 보란 듯이 성공해야겠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그 뒤로도 시험을 잘 봐도 칭찬 한 번 듣지 못했다. 악마 같은 선생님을 미워하면서 일년을 보냈다. '드디어 담임과 헤어지겠구나' 라는 생각에 행복했다.

 

하지만

 

  기독교 학교를 다녔지만,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 때도 또 담임이 됐다. 정말 최악의 순간이었다. 더욱 소름 끼치는 건 3.1절 행사(2학년 담임 발표 전)에 학교에 모였는데, 갑자기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너 며칠 전 시내에서 여자애들하고 있을 때 나 봤지?”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또 니 담임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 비열해 보이는 표정은 정말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난 또 1년 동안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군생활을 이어 나가야 했다. 익숙해 져서 그런지 좀 담담하게 지냈던 거 같다. 

 

  뒤 늦게 안 이야기지만 담임은 학부모들에게 촌지도 엄청 받았고,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만 잘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졸업 후 지역 신문에서 'K고등학교 폭력교사'라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학교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직도 교직에 있는 거 같았다 

 

  다 지난 이야기지만 정말 내 생애 최악의 2년이었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자라나는 여린 싹을 무참히 짓밟은 그 선생님을 난 아직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 하고 싶지도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근 20년여 시간이 흘러도 선생님의 너무도 냉정했던 그 말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람의 행동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이다. 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많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참 힘든 그런 현실이지만, 선생님들의 작은 편견으로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는 세상학생들이 학교에서부터 꿈을 키워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기대해 본다. 스승의 날인 오늘내 인생에서 가장 흑역사였던 시절이 떠올라 몇 자 적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