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꽃>은 짧고 단순하고 유치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순수한 고은의 매력에 빠지게 하는 시집이다. 평생 시집이라고는 학창시절 이후 처음 접해 보는 것 같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으니 스스로에게도 좀 쑥스러웠지만, 나름 감동도 받았다.
<순간의 꽃>은 117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지는 못한다. 왜냐면 시 한편을 읽을 때마다 깊은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도 많다. 너무도 짧지만 너무도 긴 여운을 주는 시집이다.
나도 누구도 매 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그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나 자신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닿아오면서 어떤 해답을 지향한다. –고 은-
모두 제목 없는 시들이다. 몇 구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오늘도 난 회사에서 늘 그렇듯이 누구의 흉을 보는 하루를 보냈다.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괜스레 고개를 숙이게 된다. 떳떳하지 못한 직딩한이…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 이 시대의 아빠들은 가혹하리만큼 힘들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늘 어깨가 무겁다. 아빠가 누우면 끝장나는 가정.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와 같은 하루하루를 우리 아빠들은 살아간다. 오늘도 나에겐 그런 하루 였다는 것을 내 새끼들은 알랑가?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 소쩍새도 별들도 온몸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는 것. 가히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초여름 밤 대청마루에 누워 소쩍새의 울음과 별들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이 드는 상상으로 속세의 찌듦을 씻어내 본다. 아~ 휴가가고 싶다.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4월 30일이 다가오고 있다. 거리도 들판도, 여의도 광장도 그리고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산들도 모두 연둣빛으로 물들겠지. 만물이 소생하는 봄. 이런 날에 무슨 사랑, 미움을 논하겠는가. 따스한 봄 햇살 받으며 생동하는 만물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다. 로이킴의 봄봄봄이 생각난다.
저 매미 울음소리
10년 혹은 15년이나
땅속에 있다 나온 울음소리라네
감사하게나
▶ 여름철 매미의 울음소리가 가끔은 지독한 소음으로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땅속에서 10년 이상의 인고 끝에 겨우 세상에 나왔는데, 고작 일주일을 살아야 되는 인생. 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경청하자. 지금의 울음소리는 10여 년 전부터 준비된 울음소리니라… 근데, 난 직장에서 10년 동안 뭘 했을까?
저 어마어마한 회장님 댁
거지에게는 절망이고
도둑에게는 희망이다
▶ 너무 재미있다. 생각의 차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차이.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며, 누구를 쳐다보며 삶의 기준을 세우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시다.
직딩한이
순간의 꽃을 읽으면서 유독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들에게만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놨다. 하지만 너무 많이 공개해 버리면 <순간의 꽃>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질 것 같아 여기까지만. 가끔은 시집을 읽는 직딩이 돼라. 갑자기 떠나게 된 출장 길에 기차나 비행기에 올랐을 때, 꽉 들어찬 지하철에서 세상 살아가는 게 갑갑하다고 느껴질 때, 사는 게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따듯한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오늘 나 완전 낭만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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