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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력을 삼켜버린 네비게이션

직딩H 2010. 8.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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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초에 네비게이션을 장만했다. 여자친구 앞에서 길을 헤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했고, 어딘가를 갈 때 마다 항상 인터넷으로 약도를 출력해서 다니는 것도, 중간 중간에 내려서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도 번거로웠다. 50만원을 투자해서 내 차에 들어온 네비게이션은 그 고가의 비용에 걸맞게 기능과 성능을 맘껏 발휘하며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했다. 당시 핸드폰에 여자친구를 N(애인)으로 저장을 했었는데, 네비는 나에게 두번 째 N이 되었다. 그러던 시간이 어느덧 4.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올 초부터 약간 맛이 가기 시작했다. 업데이트를 자주 안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끔씩 업데이트를 해주면서 네비게이션을 달래왔다. 그런데 이 맛간 네비게이션 때문에 나의 일상 생활에도 약간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입력하고 작동을 하면 친절한 목소리로 “GPS가 연결되면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어느 날부터 GPS가 연결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더니 최근에는 20-30분은 기본, 최대 3-4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수시로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새로운 기능까지 생겼다.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에서 “20m후에 유턴하세요라고 하는 참신한 기능

  이렇게 맛이간 네비게이션 때문에 나에게 생긴 새로운 문제를 깨달았다
. 단순히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약속에 늦고, 버려지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4년이라는 시간속에 내 머릿속의 지도가 모조리 지워졌다는 것이다. 네비가 잘 안되는 요즘, 차를 탔을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이제는 더 이상 내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덜컥 걱정부터 앞선다. 물론 결론은 내가 길치여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전을 시작하고 내 차를 장만해 6년 동안 네비 없이도 별 문제 없는 생활을 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네비에 의존한 지난 4년간 나는 분명히 바뀌었다. 공간에 대한 감각과 인지능력이 확실히 떨어졌다.

 
  용인 누나네 집에 다녀왔다
.(8/28) 얼마전 AS를 받아 자신만만하게 네비를 켜고 아파트 이름을 입력하고 작동시켰다. 1시간 20분거리. 잘 작동되던 네비가 분당쯤 갔을 때 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나의 신경은 곤두서기 시작하면서 사방의 이정표를 살피기 시작했다. “분당을 지나서용인시 수지…” 를 떠올리고 길을 찾다가 ! 수지다.” 진입하자마자 차가 무지하게 막혔다. “주말이라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앞에 보이는 이정표에는 수서, 잠실, 송파다시 서울로 가고 있는 한심한 내 모습 2시간 1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 5 40분쯤 출발해서 집에 돌아오니 10 넘은 시간. 역시 네비가 늦게 작동해 이정표와 나의 직감을 이용해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참 쉬운 길인데, 날도 어둡고 비도 억수같이 쏟아지고차는 꽉 막혀있고 정말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초행길이 아니었기에 판교JC를 지나 구리방면 서울외곽순화도로를 타면 금방 간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네비가 작동을 안하다 보니 경부를 타고 꽉 막히는 서울로 진입했다. 결국 양재, 서초, 강남 한복판을 가로질러 코엑스를 찾아 강일IC를 통과해 외각순환도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4시간 30분 정도의 대 장정이었다. 주말에다 비도와서 길이 많이 막혔고, 중간에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와서 시간이 좀 더 걸린 것도 있겠지만 결론은 네비가 작동하지 않아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내 자신 때문이다. 정말 운전하면서도 내가 싫었다.
 

 
  지난 8 10일에 떠난 여름 휴가. 논산의 처갓집에 들렀다가 변산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벌써 결혼 4년 차. 수도 없이 처갓집을 오갔다 했다. 그래도 항상 마이포인트로 지정해 놓고 네비를 이용했다. 서논산 IC를 지나자 마자 나오는 세 갈래 길을 네비없이 마주했다. 4년 동안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 동네였기 때문에 크게 헤매진 않았지만 정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다음날 변산으로 떠났다
. 아침부터 시원하게 잘 작동하는 네비, 그리고 뻥 뚫린 도로 덕에 2시간 넘게 예상했던 목적지에 약 1시간 30분만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만삭의 와이프와 3살난 딸내미가 있어 친구들을 뒤로하고 처갓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때의 시간 오후 7시 반. ‘9 도착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길을 떠났다. 네비에서는 “GPS가 연결되면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런데 네비는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30여분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와이프와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새만금을 지나, 부안 그리고 전주맞나?... 어두운 길을 헤매다 어렵사리 호남고속도로로 진입, 출발한지 2시간 30분만에 논산IC를 통과했다. 여전히 네비는 먹통. 그런데 논산에 진입 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처음 보는 낯선 길에서 이정표만을 의지하며 길을 헤매야 했다. 분명 처갓집이 위치한 동네의 익숙한 지명을 이정표에서 확인하면서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에서 헤맨지 1시간 30, 장인 어른께 SOS를 하려 해도 도무지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이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처갓집 근처의 산과 마을을 수도 없이 돌았다. 비슷한 길을 1시간 30분 헤매다 11 넘어 도착했다. 1시간 반 길을 4시간 넘게 운전을 했다. 만삭의 와이프와 딸내미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정말 내 자신에 화가 났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뿐만 아니라도 근 거리의 길을 헤맨 경우는 많다. 모두 올해 들어 유난히 자주 일어고 있는 일이다. 초행길에서는 누구나가 길을 헤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유난히 요즘 아는 길도 헤매는 이유는 그동안 머릿속의 지도에 대해 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단순히 길을 헤맨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네비에 의존하는 4년간 나의 뇌는 기계의 지시만을 따랐을 뿐 아무것도 입력해 놓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전(네비 장착 전)에 운전을 할 땐 항상 가는 길을 미리 검색하고 출력을 하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까 정신도 바싹 차렸다. 중간에 내려 길도 묻곤 했던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다음에 같은 곳을 찾을 때도 기억력에 의존하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난 참 길눈이 밝아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네비에 의존하면서부터 차 안에서 참으로 다양한 일들을 벌렸다. 음악을 듣는 건 기본이거니와 DMB 시청, 음식물 섭취, 문자, 전화, 잡담가끔 IT계의 혁신적인 발명품인 네비의 지시에 따르면 됐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네비에 문제가 생기면서 네비에 의존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내 기억을 되짚어 본다는게 굉장히 힘든 일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익숙한 동네길 외에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곳들이 많았다. 이정표와 감각만으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헤매며 아까운 시간을 버리는게 일쑤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공간에 대한 감각과 인지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얼마전
니컬러스 카가 펴낸 ‘인터넷이 뇌에 끼친 영향’이라는 책에 대한 논란을 다루는 기사를 봤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양한 정보화기기를 사용하게 된 인간은 더 똑똑해졌을까, 멍청해졌을까? 정보화기기가 인간의 인지능력에 끼치는 부정적인 결과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도발적 주장을 담은 책에 대한 기사였다. 네비도 아이티 혁명의 일환이기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로 기억하지 않고 단지 보기만하는 시각적인 지도에 의존하고 음성에 의존하면서 기억력 훈련 횟수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네비를 통해 엄청난 양의 길에 대한 정보를 다루면서 그동안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정말 어리석게 내는 많은 길을 가봤고, 그 길을 다 아는 듯한 착각
매스미디어 세상 속에서 수동적이 되어가는 나의 뇌를 가만히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례로 내가 겪은 네비게이션에 대한 이야기만을 언급했지만 더 나아가 모든 아이티 혁명이 그저 우리를 풍족하게만 해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깊이 있는 생각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나의 두번 째 N은 내일 바로 병원(A/S센터)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 나에겐 스마트한 네비도 필요하지만 잘 편집된 지도책이 한 권 더 필요하다는 것을네비가 없으면 불편하겠지만 네비를 사용하는 횟수를 줄이고, 스스로 길을 찾는 훈련을 가끔씩은 해야겠다. 나의 뇌에게 이젠 그만 쉬고 일어나라는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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